저 무심한 하늘과 산과 나무와 강물도 문득 돌아보면 마음 속에 점 하나로 찍혀 영원히 뺄
수 없는 문신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자연은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기억 속에서 완성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한 마디의
감탄사를 거쳐 사라질 것이라면 굳이 풍경이라 말하지 말자.
눈을 깜빡거릴 때 내 눈 안으로 들어온 물체가 수정체를 통과하여 망막에 상을 맺는 순간,
정신의 한쪽 문이 스스로 열리며 진공 청소기의 흡인력으로 가슴까지 빨려 들어가는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구름이 있다. 그것은 이제 영원히 기억의 창고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언제
어디서든 내 앞에 설 수 있다. 그리곤 그 풍경의 자리에서 인생의 의미를 묻게 해 준다. 넌
그 때 거기서 무얼 보았느냐고? 넌 그 때 그 자리에서 무얼 느꼈느냐고? 누군가는 되묻는다.
그건 단지 한 그루 나무였다고, 그건 단지 흘러가는 구름이었을 뿐이라고, 그건 단지 우뚝
솟은 바위산이었을 뿐이라고.
그렇다. 풍경이란 나만의 것이다. 너에게 단순한 한 그루 나무에 불과했던, 저 영월 가는 길
한여름 들판에서 만난 미루나무 한 그루가 내게는 지울 수 없는 생의 고독을 의연히 보여주
는 '추사'의 '세한도'였다. 어느 해 1월 해질 무렵 속초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렸을 때 멀리
보이던 시커먼 설악의 등줄기가 내게는 사흘 내내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생의 무게였던 것
이다. 아무리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지지 않는 육중한 바위덩어리 같은 것이었으니, 단순히
저물녘 산그림자로만 남아있다는 너에게 어찌 풍경이 될 수 있겠는가. 너에게 무심히 스쳐
지나간 경치가 나에겐 한편의 시가 되고, 그림 한 점이 되는 것이다. 언제라도 인화할 수 있는
암실 속의 필름으로 남아서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풍경이다.
나, 이번에 보았던 화왕산의 가을도 경치가 아닌 풍경이었다. 굽이치는 빛의 파도 너머 일렁
이는 쪽빛 하늘이 지중해에서 보낸 그림 엽서인 양 내려와 앉는다. 그 언저리 어디쯤에
시월의 바람 소리가 고추잠자리처럼 매달려 있을 때, 내가 본 것은 바람을 데리고 노는 햇빛
이었을까? 억새를 애무하는 바람이었을까? 그것은 빛의 나부낌이다. 가녀린 몸짓, 찬란한
은빛 일렁임은 물결치는 파도였다.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틈새 사이로 내 마음이
달려가 눕는다. 시월의 하늘은 휘장처럼 나의 눈을 가리지만 쏟아지는 햇빛은 기어이 내 눈을
꿰뚫고 지나간다. 난 눈 먼 장님이 되어 보이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며 지팡이도 없이 여기
저기를 더듬는다. 가끔씩 손에 잡히는 건 그의 옷자락이다. 지금 이 순간 파도치는 억새바다엔
그도 없고 나도 없다. 파도에 쓸려 한 줌 모래처럼 어디론가 밀려갔다. 그도 없고 나도
없으니 억새로 몸을 가리고 알몸의 사랑을 해 보고 싶다던, 지난 가을의 욕망은 부질없는
꿈일 뿐이다. 바람과 햇빛과 억새가 한몸이 되어 음악처럼 물결처럼 서로를 애무하고 핥고 춤추
듯이 뒹구는데, 그 사랑 절정을 향해 사르륵사르륵 신음 소리를 내지르는데, 그 소리에 천지가
화답하듯이 온산이 다 너울춤을 추는데, 너와 나의 알몸 사랑이란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얼마나
허망한 것이랴! 나는 시인이 되어 시 한 편을 써야 하는데.....화가가 되어 풍경화 한 점을 그려야 하는데.....
억새를 껴안는 바람의 사랑, 햇빛의 사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 황홀해진다. 사랑은
주인공의 몫이다. 사랑의 슬픔도 사랑의 기쁨도 모두 주인공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다.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 아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너와 나의 몸짓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 적막 속에서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바람과 햇빛뿐이다.
내려오는 길 과수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감을 따는 아낙네의 손길에 가을의
숨소리가 주황색 꿈처럼 물들고, 국도변 코스모스 한들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웃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냥 스쳐지나갈 하나의 배경일 뿐이지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문신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건 풍경화로 남겨지지 않았다.
** 보너스 시 한 편 **
수 없는 문신으로 남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자연은 비로소 하나의 풍경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풍경은 기억 속에서 완성되는 것 아닐까? 아무리 아름다운 경치라도 한 마디의
감탄사를 거쳐 사라질 것이라면 굳이 풍경이라 말하지 말자.
눈을 깜빡거릴 때 내 눈 안으로 들어온 물체가 수정체를 통과하여 망막에 상을 맺는 순간,
정신의 한쪽 문이 스스로 열리며 진공 청소기의 흡인력으로 가슴까지 빨려 들어가는 나무가
있고 산이 있고 구름이 있다. 그것은 이제 영원히 기억의 창고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언제
어디서든 내 앞에 설 수 있다. 그리곤 그 풍경의 자리에서 인생의 의미를 묻게 해 준다. 넌
그 때 거기서 무얼 보았느냐고? 넌 그 때 그 자리에서 무얼 느꼈느냐고? 누군가는 되묻는다.
그건 단지 한 그루 나무였다고, 그건 단지 흘러가는 구름이었을 뿐이라고, 그건 단지 우뚝
솟은 바위산이었을 뿐이라고.
그렇다. 풍경이란 나만의 것이다. 너에게 단순한 한 그루 나무에 불과했던, 저 영월 가는 길
한여름 들판에서 만난 미루나무 한 그루가 내게는 지울 수 없는 생의 고독을 의연히 보여주
는 '추사'의 '세한도'였다. 어느 해 1월 해질 무렵 속초 고속버스 터미널에 내렸을 때 멀리
보이던 시커먼 설악의 등줄기가 내게는 사흘 내내 나를 무겁게 짓누르던 생의 무게였던 것
이다. 아무리 내려놓고 싶어도 내려지지 않는 육중한 바위덩어리 같은 것이었으니, 단순히
저물녘 산그림자로만 남아있다는 너에게 어찌 풍경이 될 수 있겠는가. 너에게 무심히 스쳐
지나간 경치가 나에겐 한편의 시가 되고, 그림 한 점이 되는 것이다. 언제라도 인화할 수 있는
암실 속의 필름으로 남아서 나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바로 풍경이다.
나, 이번에 보았던 화왕산의 가을도 경치가 아닌 풍경이었다. 굽이치는 빛의 파도 너머 일렁
이는 쪽빛 하늘이 지중해에서 보낸 그림 엽서인 양 내려와 앉는다. 그 언저리 어디쯤에
시월의 바람 소리가 고추잠자리처럼 매달려 있을 때, 내가 본 것은 바람을 데리고 노는 햇빛
이었을까? 억새를 애무하는 바람이었을까? 그것은 빛의 나부낌이다. 가녀린 몸짓, 찬란한
은빛 일렁임은 물결치는 파도였다. 솟아올랐다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틈새 사이로 내 마음이
달려가 눕는다. 시월의 하늘은 휘장처럼 나의 눈을 가리지만 쏟아지는 햇빛은 기어이 내 눈을
꿰뚫고 지나간다. 난 눈 먼 장님이 되어 보이지도 않는 눈을 깜빡이며 지팡이도 없이 여기
저기를 더듬는다. 가끔씩 손에 잡히는 건 그의 옷자락이다. 지금 이 순간 파도치는 억새바다엔
그도 없고 나도 없다. 파도에 쓸려 한 줌 모래처럼 어디론가 밀려갔다. 그도 없고 나도
없으니 억새로 몸을 가리고 알몸의 사랑을 해 보고 싶다던, 지난 가을의 욕망은 부질없는
꿈일 뿐이다. 바람과 햇빛과 억새가 한몸이 되어 음악처럼 물결처럼 서로를 애무하고 핥고 춤추
듯이 뒹구는데, 그 사랑 절정을 향해 사르륵사르륵 신음 소리를 내지르는데, 그 소리에 천지가
화답하듯이 온산이 다 너울춤을 추는데, 너와 나의 알몸 사랑이란 사라지는 물거품처럼 얼마나
허망한 것이랴! 나는 시인이 되어 시 한 편을 써야 하는데.....화가가 되어 풍경화 한 점을 그려야 하는데.....
억새를 껴안는 바람의 사랑, 햇빛의 사랑을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 황홀해진다. 사랑은
주인공의 몫이다. 사랑의 슬픔도 사랑의 기쁨도 모두 주인공만이 누릴 수 있는 전유물이다.
우리는 이제 주인공이 아니다. 배경으로 등장하는 너와 나의 몸짓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이 적막 속에서 오로지 존재하는 것은 바람과 햇빛뿐이다.
내려오는 길 과수원에는 감이 주렁주렁 열려 있다. 감을 따는 아낙네의 손길에 가을의
숨소리가 주황색 꿈처럼 물들고, 국도변 코스모스 한들거리며 나를 향해 달려오고 웃지만,
그 아름다움은 그냥 스쳐지나갈 하나의 배경일 뿐이지 지워지지 않을 마음의 문신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그건 풍경화로 남겨지지 않았다.
** 보너스 시 한 편 **
화엄 벌판--이상범
( 양산 천성산에 원효설법의 화엄벌판과 바위 좌대가 있고 주변에 억새꽃이 평원을 이뤘다.)
억새가 나부끼며 빛을 끌어당긴다.
몸 비비며 금빛 띠고 다시 비벼 은빛 띠는
아직도 섬찍섬찍한 그 말씀의 영락소리......
아득한 변방에서 물소리가 산을 오른다
망루의 높이에서 가슴을 치는 골몰
내 눈빛 맑게 바래어 흩고 있는 억새꽃.
정수리 찍어대면 샘물 터져 뿜을까
좌대에 눈 감으면 그 여운의 높은 파고
잃은 것 얻은 것 없는데 밀짚 모자 홀로 간다.
가을 하늘 한 장 떼어 거울경문 걸어두면
뉘이며 일어서는 비늘빛 화엄설법
육신은 보시로 올리고 바람 속에 듣는다.
****************
억새의 나부낌
화엄의 바다로 이해한 시인
육신을 보시로 바치고
남은 영혼으로 듣는 설법의 세계
시조의 맛갈스러움을 이리도 단아하게 보일 수 있다니
글밭을 일구느라 그 시인 얼마나 많은 날을
연필 깎아들고 별빛 아래 서성이었을까.
미루나무 한 그루
출처 : 엽서 한 장
글쓴이 : nul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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